성보문화유산

원효사 비지정문화재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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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탑

원효사 인구의 부도전에 있는 석종형 부도이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장방형 석재를 

지대석으로 하여 석종형 탑신을 받게 하였는데 현재의 지대석은 원래의 탑재가 아닌 

것으로 보여진다. 석종형 탑신 중앙에 “원효국사탑”이란 탑호를 음각하였으며, 상륜부의 

처리는 지극히 형식적이다. 회운당 부도와 함께 19세기에 조성된 작품으로 보여지며, 

지대석을 제외한 총고는 105㎝이다. 



회운당 부도

원효국사 부도와 함께 입구의 부도전에 위치한 석종형 부도이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장방형 지대석 위에 석종형 탑신을 받게 하였는데 이 지대석 역시 원래의 탑재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탑신 중앙에 “회운당”이란 당호가 음각되어 있다. 

그런데 탑신부의 하단 직경이 상단에 비해 유난히 작아져 안정감을 잃었으며, 지극히 

형식화된 상륜부의 처리수법과 함께 말기적인 요소를 보여주고 있다. 

회운대사는 1789년(정조 13)선방을 중창하였으며 1802년(순조2)에는 대웅전을 중창한 

인물이다. 지대석을 제외한 총고는 95㎝이다. 

 


진성당 부도

부도전에 있는 대리석제 부도로서 1984년에 조성되었으며 8각원당식 부도양식을 

다소간 보이고 있다. 방형 지대석 위에 다시 방형의 하대석을 설치한 후 그 위에 1단의 

8각괴임을 마련하여 복연대와 앙연대를 중첩하여 올렸는데 모두 복판8엽의 연화문이다. 

장타원형의 탑신을 받고 있는 앙연대가 탑신보다 훨씬 작아 전체적인 균형을 잃었다. 

탑신에는 “진성당”이란 당호가 종서로 음기되어 있다. 옥개석은 8각인데 매우 두텁고 

8우동에 각기 용두를 장식하였다. 상륜은 복연과 앙연을 중첩시킨 위에 연봉(보주)을 

올렸다. 부도의 규모는 총고 228㎝이다.


 

원담화상탑

부도전에 있는 탑으로서, 원형의 지대석위에 방형의 중대석과 원형의 앙연대를 

마련하여 방형탑신과 옥개석을 받고 있다. 장방형을 이룬 탑신 전면에 “원담화상탑”이란 

탑호가 종서로 음기되었고 그 탑호의 좌우 여백에 

“削髮本寺元曉遺墟 受法會雲圓潭承勳 道旣超 蹟則然 

塔斯屹理難訣 崇禎紀元後五丁卯十一月日”이란 명기가 있어 원담의 내력과 탑의 

건립시기(1927년: 숭정기원후오정묘)를 알려주고 있다. 

원담화상은 1927년 원효사를 중수한 인물인데 동년에 이 탑이 세워진 것은 부도로서 

보다는 그의 중수업적을 기리는 기념탑으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다.

 


응담화상 기념탑

전술한 원담화상탑처럼 정응담대사가 1938년에 중수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기념탑이다. 원효사 입구 돌탑 옆에 위치하고 있고, 형태는 원담화상탑과 같은 부도의 

형식이 아닌 일반적인 비의 형태를 취했다. 탑신 중앙에 “응담화상 기념탑”이란 탑호를 

종서로 음각하고 그 좌우의 여백에 

“元曉道場 淸淨守護 來空去空 慈悲謙恭 募綠重修 曰德曰業 設塔表功”이란 업적을 

기리는 내용의 명문을 새겼다.

 

 

일학화상 실적비 



원효사의 비

원효사 경내에는 모두 4기의 비가 부도전과 지장전 뒷편에 흩어져 있는데 

一鶴和尙實蹟碑, 造塔士女氏名開錄之碑, 鵬南居士池公應鉉․夫人淨明月金桂氏 

善德功蹟碑 및 淨明月金夫人桂․鵬南居士池公應鉉 功蹟不忘碑 등이 그것이다.

이들 중 일학화상실적비와 조탑사녀씨명개록지비는 1944년 주지 김동성대사와 일학대사 

그리고 지응현거사와 김정명월 보살이 중심이 되어 석가탑과 관음탑을 조성하고 사찰을 

보수한 사실과 그 업적을 기록한 비이다. 또한 후자인 지응현․김계의 선덕공적비 및 

공적불망비는 1944년의 조탑불사 뿐만 아니라, 1954년부터 1960년까지 6.25전란 이후의 

중건불사에 대시주로서 참여한 지응현․김계부부의 공덕을 찬양하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이다.

 

 

원효사 석조지장보살입상

현재 지장전 뒤쪽의 축대 위에 불상과 광배가 1매로 조성된 석조보살입상이 1구 세워져 

있는데, 총고 124㎝․불신고 100㎝․최대폭 56㎝의 소규모 불상이다. 특별한 대좌시설이 

없이 자연암반 위에 올려 놓았는데, 곁에는 이전에 대좌로 이용했던 석탑의 옥개석이 

놓여있다.

불상의 세부양식을 살펴보면 삭발의 머리와 왼손에 받쳐든 보주 그리고 오른손에 쥐고 

있는 戒杖으로 보아 지장보살임을 알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인데 가슴부분에 X자 모양으로 

묶인 매듭이 보인다. 양팔에 걸쳐서 내려뜨린 옷자락은 매우 단정하게 대칭을 이루나 

비교적 무겁게 느껴진다.

광배는 단형이며 굵은 띠와 같은 원형의 두광을 둘렀다. 단형광배의 상단은 두부의 

조각이 깊어 약간 앞으로 굽은 모습이다. 신체에 비해 다소 작은 두부와 찡그린 상호, 

섬약한 어깨와 무섭게 처리된 의습의 등은 근년에 작품임을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기타 유물

현재 원효사에는 오랜 사찰의 역사에 비해 그 사력을 입증할 만한 석탑이나 석등과 같은

 특별한 석조 유물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경내의 여기저기에 석탑과 석등의 부재들이 

보여질 뿐이다.

현재 대웅전을 향하여 우측에 위치한 승방의 전정에는 석조물의 부재와 파편들이 상당수 

수습되어 있다. 이들 중에는 석등의 복연대를 비롯하여 석탑의 옥개석편 등이 보여지며, 

지장전 뒤편의 빈터에도 석조 지장보살입상 곁에 석탑의 옥개석 1매가 놓여있다. 

이 옥개석은 최근까지 바로 곁에 세워진 보살상이 도로변에 놓여 있을 때 그 대좌 구실을 

했던 옥개석으로 4단의 층급받침을 갖추었다.

현재 경내에 남아있는 비문 등의 자료에 의하면 1944년 주지 김동성과 지응현이 석가탑과

 관음탑을 조성한 사실이 보여지나, 이러한 석조물마저 6.25의 전화로 인해 파기되어 

그 모습을 대할 수 없다. 현재 승방의 전정에 수습되어 있는 파편중 석탑부재들은 

석가탑과 관음탑의 부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석조계단을 거치지않고 출입하는 차도쪽 입구에는 범자로 진언문이 새겨진 

장방형 표주가 넘어진 채 놓여있다.

 

 

기타 문화재

1960년 원효사 대웅전 정초작업중 구초석 아래에서 12~13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금동비로자나불 좌상 1구와 도제백불 3체가 출토되어 원효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오다가 

어떤 연유로 말미암아 사가를 전전한 후 광주시립박물관에 이관되었다. 

그러나 1974년 7월 15일에 박물관에서 도난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