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과 연혁
원효사 대웅전 전경
원효사의 창건설로는,
① 신라 법흥왕에서 지증왕 (500~540) 사이,
② 원효국사(617~686),
③ 통일신라 말기,
④ 고려 충숙왕대(1314~1339)의 창건과 중건설 등이 있습니다.
원효사의 창건내력을 자세하게 적은 기록으로는 1637년(인조 15년)의 『불상기(佛像記)』, 1641년(인조 19년)의 「법당중창기」, 1847년(헌종 13년)의 「원효암중건기」, 1894년(고종 31)의 「원효암중수상량문(元曉庵重修上梁文)」 등에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선사찰사료」에 전하는 원효암중건기에 「瑞石山之北 有元曉庵 新羅國師元曉 愛其山明水麗築庵 而居乃 以其名之 始創年代 雖未可攷要 在於法興智證 兩朝之間 而瑞石爲湖南之明山 元曉爲瑞石之舊刹也...」라 전합니다.
풀이하면,
서석산(무등산의 옛 이름)의 북쪽에 원효암이 있는데, 신라국사 원효가 그 산자수려함을 사랑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살았으므로 그 (사찰)이름이 되었다. 창건 년대는 그러나 법흥왕과 지증왕 양조의 사이에 (이미 사찰이) 있었으므로 상고하여 보면 가하지가 않다. 서석산이 호남의 명산이므로 원효를 서석의 구찰(원찰)로 삼은 것이라.
즉,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원효사의 신라 창건설이 담긴 문헌기록에 대해 일부 부정적인 주장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1980년 5월에 국립광주박물관에서 대웅전을 해체복원하기 위하여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신라 때 조성한 금동불과 기와조각 등 보물급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학계의 큰 관심을 모은 바 있으며, 이들을 근거로 신라 때 창건한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원효대사에 의한 창건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고증자료가 될 만한 옛터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 기와조각이 발견되었고, 그 밖에 고려시대 말, 조선 초기로 추정되는 부도와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부도, 그리고 강희년명(康熙年銘)의 범종 그 밖에 석탑조각 등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있습니다. 이로써 원효사는 천년고찰의 역사를 다시한번 자랑하게 되었으며, 이 때 출토된 유물들은 유형문화재 8호로 지정되어 광주국립박물관에 보관, 전시 하다가 현재는 송광사 박물관에 보관되어지고 있습니다.
이밖에도 고승 대덕을 추앙한 나머지 화엄종의 한 명승이 고려 충숙왕(1314 - 1339) 때에 무등산을 찾아 여기에 절을 짓고 원효대사의 이름을 따서 원효암이라 하였다는 ④설도 있으나,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출토된 유물 등에 비추어보면 근거가 약합니다.
한편 1980년 6월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 등을 근거로 하여 창건시기를 ③ 통일신라시대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원효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소규모 암자로 세워졌다가 고려 충숙왕 때에 대규모의 사찰로 중건된 것으로 봅니다. 이 설은 문헌에 전해오는 사료보다는 출토된 유물에만 의존한 설입니다.
이상의 여러 설에서 공통되는 것은 오랜 역사이며 원효성사의 업적을 숭상하고 이어가려고 하였다는 점입니다. 특히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통일신라에서 고려․조선시대에 걸치는 와당과 “원효사”명이 보이는 조선초의 명문 기와 등과 같은 유물자료들이 이러한 기록에 의한 사력을 물증으로써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원효사 연혁
원효사의 확실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라 지증, 법흥왕대(AD 500~539)라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하며, 『조선사찰사료』 원효사 중건기에 의하면, 원효성사(AD 617~686)가 산명수려한 서석산을 좋아하여 암자를 지었으므로 그 이름이 원효사가 되었다 합니다. 이상 사료들을 종합하여 원효사의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추정해 봅니다.
원효사는 신라 지증왕(재위 500–514), 법흥왕(재위 514-540), 양대에 이름모를 조그만 암자로 세워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원효성사가 이곳에서 머물면서 수행정진 하였고 성사의 덕을 추모하여 개창조로 모시고 원효암으로 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대 | 내용 |
고려시대 | 화엄학의 대강당이었음. |
조선시대 | 宣祖代(1568~1608)에 의승장이었던 騎虛堂 영규대사가 주석. |
1597년 | 정유재란시 화신(火燼)됨. |
1609년 | 을유년에 증심사를 중창한 석경대사(釋經大師)가 복원. |
1636년 | 인조 14년에 신원대사(信元大師)가 중수. |
1637년 | 인조 15년에 옥견대사(玉堅大師)가 32불상을 조성봉안, 중수. |
1639년 | 중종 34년 사찰혁파시 동국여지승람 광산현조(光山縣條)에 원효사(元曉寺)가 기록. |
1685년 | 숙종11년 신옥(信玉), 정식대사(淨式大師)가 중수. |
1789년 | 정조 13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선방을 지음. |
1802년 | 순조 2년 회운대사(會雲大師)가 대웅전을 지음. |
1831년 | 순조 31년에 내원(乃圓) 의관대사(義寬大師)가 중수, 단청까지 마침. |
1847년 | 헌종 13년 내원대사가 칠성각을 신축. |
1894년 | 함명 태선(1824~1902)스님의 〈무진주 무등산원효암중수상량문〉에 의하면 학산대사가 관청에 호소해 100금의 재력을 시주받고 고을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사찰을 중건. |
1927년 | 원담대사(圓潭大師)가 중수. |
1930년 | 이 지방 토호였던 지응현(池應鉉), 김정명월(金淨明月)등이 주가 되어 칠성각, 시왕전 등의 대중수. |
1938년 | 정응담(鄭應潭) 대사(大師)가 중수. |
1944년 | 주지 김동성(金東成) 대사(大師), 일학대사(一鶴大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정명월(金淨明月) 보살 등이 중심이 되어 석가탑, 관음탑을 만들고 사우들을 보수. |
1950년 | 6.25 전화(戰火)로 전소(全燒)됨. |
1954년~ 1960년 | 주지 김인곡(金麟谷)과 총무 김금파사(金錦波師), 지응현(池應鉉) 거사, 김명정월(金淨明月) 보살, 옥천 지창선(池昌宣) 거사 등이 대시주가 되어 사우 일부를 옛 규모보다 축소하여 복구함. |
1974년 | 정지우사(鄭智牛師)가 주지로 취임하여 소유권 문제로 3년간의 재판 끝에 정화를 매듭짓고 복원불사계획을 수립하여 일부 착수하였으며, 축대를 쌓고 헌 건물을 철거함. |
1980년 | 법타(法陀)스님이 대웅전 요사채 명부전을 신축복원하고, 칠성각을 보수하였다. 또한 무등산 도립공원 원효사 주차장을 만들어 장래의 원효사 수입원을 확보함. |
1992년 | 현지(玄旨)스님에 의해 성산각, 개산조당, 요사, 종각, 누각 등의 건물을 세움. |